공지사항

2019. 1. 19. 01:19
book judain

매일은 아니지만 차군이 나를 잔소리 하게 만드는 일들을 한 컷으로 기록하고 있다. 왜 나 한입도 안주고 혼자 다 먹어? 왜 약속 안지켜? 말을 꺼내다보면 화나 짜증이, 서운함이 증폭되는데, 대신 메모를 하고 앉아있으면 많이 누그러진다. 내가 일어나 달려들지 않고 말없이 펜과 노트를 꺼내면 차군은 또 뭘 쓰나 하며 눈치를 본다. 뒤에서 몰래 빼꼼히 보고 있을때도 있다. 써놓은 걸 보려고 하면 이건 유료콘텐츠라고 말하는데, 아직 제값을 치른 적이 없다. 그래 초반엔 무료로 풀어야지.

남편의 치부책을 써내려가는 나와 달리, 매일의 사랑을 그림일기로 남기는 스페인 남자의 책을 알게 됐다. 책 소개만 보고 읽어봐야지 했는데 온라인에는 재고가 없어 퇴근길에 교보문고 합정점에서 남은 한 권을 손에 넣었다. 제목은 <너의 나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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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지나면 우리는 많은 걸 잊게 될 거예요. 우리 삶은 매순간 사소하지만 큰 즐거움, 슬픔, 사랑, 미움, 존경, 무지와 같은 근본적인 감정으로 차 있는데 말이죠. 저는 이 모든 걸 되돌아보고 기억하고 싶습니다. 행복했던 날들과 마음 아팠던 날을. 왜 최선을 다했고 왜 실패했는지 이해하고 싶어요.”




한국 여자와 결혼해 경남 진주에서 살고 있는 아드리안은 아직 많이 부족한 한글 실력이지만 정성껏 하루를 표현하고 있었다. 알고 있는 단어로 드러낼 수 있는 최대치는 오히려 명확하게 읽혔다.




인생에는 즐겁고 신나는 일, 아프고 힘든 일들이 자꾸자꾸 있다. 기록된 날과 기록되지 않은 날들 모두를 빈틈없이 채우는 것이 언제나 서로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기를.

아내에게 선물해 주려고 그리기 시작했다는 그림일기를 읽고 있으니 내가 쓰는 치부책이, “여태 나한테 한 짓을 보라”는 불순한 마음이 조금 부끄러워졌다.

하지만 이내 바꿔 생각하게 됐다. 내가 쓰고 있는 건 일상을 가득 채우는 우리의 행복 중 일부를 <서운함>시리즈로 엮은 것 뿐이라고. 그 서운함을 둘러싼 것은 온통 사랑이라고. 낄낄.




”내가 풍향계라면 너는 나의 바람이야”
사랑하는 남녀는 서로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주는 존재다. 그러니까 이왕이면 밖에서 힘들었던 일들도 다 괜찮아지게 하고 힘이 나고 웃게 하는, 그런 존재가 되어주어야 하겠지.

사랑하는 여자를 따라 한국 생활을 선택한 스페인 남자의 사랑이 아주 특별한 것 같지만, 결국 사랑하는 이들은 모두 서로 다른 <너의 나라에서> 살기를 작정한 것이므로. 그 대단한 선택과 모험을 나도 하고 있는 내 사랑도 특별하다고. 자신한다.




<너의 나라에서 ; 스페인 사람 아드리안의 한국 일기>
아드리안 토마스 사밋, 프로파간다.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