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사항

2014. 5. 2. 17:50
book judain
지금 거제도에는 바람이 많이 분다. 집 안에 있어도 바람소리가 쇠쇠 들린다. 아침까지 맑던 하늘도 회색. 그래도 스타벅스 가서 라떼나 한 잔 해볼까 하고 나왔다.



들고나온 책은 천양희 산문집 <나는 울지 않는 바람이다>. 어제 터미널 가기 전에 교보문고 강남점 들렀다가 샀다. 얼마 전 '밥'이라는 시로 나를 콕콕 찔러댔던 그녀의 책이라 궁금해서 들추었는데, 작가의 말부터 나를 굳게 했다.

"나는 그동안 막다른 길에 다다르거나 길을 잃고 헤맬 때마다 삶을 주도하는 진짜 힘은 자신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된다고 생각하며 어려움을 극복했다. 인간의 강점 중 하나는 멍들었다고 해서 썩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헤맨다고 다 길을 잃는 것은 아니듯이. 한때는 '추억이 고통이었고 기억이 고문'이었지만, 지금은 나를 아프게 했던 많은 것들을 고독을 지키면서 넘어서게 되었다." - 작가의 말 중에서

책장을 무겁게 만드는 문장들. 그중에서 "할 말을 줄이고 산 날들이 떠오른다. 이런 날은 바람이 마음 한 가운데로 뛰어 들어오는 것 같다." 라는 구절을 읽는데 문득 엄마 생각이 났다. 오늘 오전, 엄마가 산 날들이 말이 되어 쏟아졌을 때 그 말을 듣는 딸래미 마음 속에는 회오리 같은 바람이 일었었다.


아침부터 엄마는 애미넴 모드. 무슨 얘기를 하다가 옆길로 빠졌는지, 맥락도 없었던 것 같은데. 정신차려 귀 기울여 들어보니 신혼 초 시댁살이 에피소드를 구구절절 읊어내고 계셨다. 결혼하고 한두달 쯤 지나 아빠와 오토바이 데이트를 하고 왔더니 "시애미 밥도 안차리고 놀다 왔다"며 난리난리난 얘기, 뱃속에 오빠를 가지고 입덧이 심해 제대로 못먹으니 '유난스럽다'며 핀잔들은 얘기, 그런 때 아빠가 엄마 편이라도 들면 "애미보다 각시가 중하냐"고 삐쳐서는 한달이고 두달이고 말도 안 했다는 속상한 얘기.

엄마가 마음 속에 품었던 그 살아온 날들이 봇물 터지듯 이어지는데, 그걸 누워서 가만히 듣고 있으니 엄마와 할머니의 얘기가 아닌 한 여자의 젊은 날이 바람결에 펼쳐졌다. 그건 배경색만 흑백일 뿐, 요즘 만나면 듣는 친구들 얘기였다. "시댁 식구들은 잘 해주나"하면 "야. 말도 마라"하면서 시작하는 그런 얘기.

낯선 사람들과 식구가 되어 할 말을 줄이고 살아왔던 지난 날, 엄마의 마음에는 얼마나 바람이 잦았을까.

하지만 그런 아련함도 잠시, 같은 말이 두번 세번 반복될 쯤 "그 얘긴 아까 했잖아"하고 맥을 끝는 딸래미가 못마땅한 엄마는 "니도 내 나이 되봐라" 하고 성을 냈다. 삼십년이 훌쩍 넘은 후에야 내뱉는 엄마의 산 날들은 그렇게 곁에 누운 딸래미에게 차가운 역풍이 되어 불었다.


오랜만에 마시는 스벅 라떼는 부드럽고, 책도 읽고 이런 저런 생각도 하고 한참 좋았는데. 그즈음 회사에서 걸려온 한 통의 전화로 얼굴에도 마음에도 구김이 갔다. 미처 처리하지 못한 업무 때문이었다. 선배한테 전화해서 부탁하고 일단 급한 불을 껐지만, 본의 아니게 '책임감 없는 사원이 됐다'는 생각에 불편했다.

살다보면 그런 날도 있지! 한숨 몰아쉬고 애써 언짢은 기분을 밀어내려 다시 책을 읽었다. 문장들은 계속해서 묵직묵직했고, 어떤 것들은 마음 속으로 뛰어들어와 나를 위로했다.

나는 독서 휴가를 만끽중. 휴가에 읽을 책도 제대로 고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