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사항
탐서주의자의 책. 표정훈. 마음산책. 2004.
북멘토 명단에서 표정훈님의 이름을 뵙고 반가웠다.
그는 내가 이전에 읽었던 '탐서주의자의 책'라는 책을 지은 저자다.
책 리뷰라고 하긴 뭣하고, 이 책에서 따온 몇 구절과 주절거림을 포스팅하련다. 내 마음이다.
#.
도덕의식까지는 아니더라도 준법의식을 마비시킬 정도의 책 욕심이라면, 예술에서 말하는 유미주의唯美主義, 탐미주의耽美主義와 비슷한 맥락에서 유서주의唯書主義, 탐서주의耽書主義라는 말을 적용해도 좋을 듯 하다. 그렇다면 탐서주의자는 '책의 소유를 삶의 유일지상의 목적으로 삼고, 책 내용보다는 책 자체를 중시하며, 책을 진과 선 위에 두는 사람'이 된다. 나는 비록 30분 남짓한 시간이었지만 탐서주의의 치명적인 욕망에 빠졌던 것이다.
[p.28]
'탐서주의'라고 붙인 이름이 좋았다.
책을 탐한다는 욕심에 '주의'가 붙으니, 뭔가 대단한 사상이나 철학 같아 보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그렇다고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 '나 탐서주의자요'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킁!
#.
학교시절 도서관에서 아름다운 여학생 혹은 잘생긴 남학생 바로 앞에 앉아 남몰래 가슴 콩당거린 적이 있는 사람이 드물지 않을 듯 하다. 왜 하필 도서관일까? 우선 무언가에 가장 집중해 있을 때의 모습 때문이 아닐까 한다. 여성이든 남성이든 무언가에 전념하고 있는 모습은 대부분 아름답다. 평소 다른 모습에서는 느끼기 힘든 그 사람의 고양된 영혼 같은 것이 얼굴 주변에 서려있는 느낌이랄까.
또한 도서관에서는 묵언의 규칙이 통용된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말을 하지 않거나 한다 해도 들릴 듯 말듯 소곤거려야 하는 건 물론이고, 몸의 움직임도 지나치게 크거나 빠르지 않게 대체로 조심스런 몸가짐을 해야 한다. 몸으로나 마음으로나 삼가고 침잠해야 하기 때문에, 차라리 어떤 성소에 들어와 있는 분위기 마저 느낄 수 있다. 요컨대 이성을 향한 애틋함 같은 것이 한결 증폭될 수 있는 분위기, 묵언에 대한 일종의 반작용으로 다언(多言)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지는 분위기!
그 밖에 도서관 건물의 자연 채광과 내부 구조 등을 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느 봄날, 조금 열어둔 도서관 창문에서 따뜻한 바람이 불어오고 햇볕은 자꾸만 얼굴을 간질이는데, 내 앞자리 그녀 혹은 그의 좋은 체취가 코끝을 감싼다. 한마디로 '그림이 나오는거다.' [p.156]
누구나 그럴테지만. 도서관에서의 만남을 꿈꾼 적이 있었다.
학구열을 불태우며 늘 도서관 그 자리에서 죽을 치는 복학생 오빠라도 (잘생겨서) 나쁘진 않았다.
오히려 공공도서관에서 형법이니 상법이니 하는 사전같은 책들을 끌어안고 있는 츄리닝이 두려웠지. (뭔가 신분을 알 수 없는 이유로!) 학교 울타리를 뛰어넘은 지는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서서히 도서관 사랑에 대한 로망이 사라져 간다...만?
그래도 책 자체에 대한 서지학적 애정을 가진 사람에게 만큼은 무조건 반사와 같은 관심이 부풀어 오른다.
먼지쌓인 고문헌들에 둘러쌓여서는 안경을 코 끝까지 내려낀 꼬장꼬장한 노교수에게도 싫지 않은 마음을 품는데, 대형 서점 코너 끝에 널부러져 앉아 책을 읽고 있는 장년은 그렇다쳐도 학교 도서관 햇빛 드는 창가에 기대 책을 읽는 청년에게 매력을 어찌 아니 느낄 수 있겠는가!
음, 안되겠다. 지속적으로 '책'과 인연을 좇아가야지. 야호!
(저에게 마음이 있으시다면, 이번 주말 저녁에 관악도서관 일반자료실로 오세요? 우헤헤. '이거 여러 사람 주말 낚겠고만.' 요즘 자꾸 박지선 같아진다.)
#.
'잔은 비워야 맛이고, 님은 품어야 맛'이라는 술자리 객담대로라면 '책은 읽어야 맛'이겠지만, 술잔이나 어여쁜 님과 달리 '책은 읽지 않아도 맛'이다. [p.231]
요즘들어 책에 대한 마음이 더욱 커진다.
그래도 도서관에 있으면 '저것이 내 책은 아니라도 언젠가 한번쯤은 내 손에 돌아올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만,
사무실이란 곳에서는 매일 새로운 책들이 우당탕 오고 가는데- 그야말로 그림의 떡이 공중에 떠다니고 있으니!
서점가면 한번 훑어나 봐야지, 월급타면 사야지. 하고 끙끙대는 마음이 증폭될 수 밖에! 아아아아아악.
사실 내가 가진 책들 중에는 갈피 한번 제대로 펴지 못한 것도 많다. 이것이 '책은 읽지 않아도 맛'이라는 저 표정훈씨의 주장에 힘 입어 철저한 '탐서'의 산물이라고 말하고 싶다. 좀 읽어야 하는데... 베르베르의 신 3,4권이 나와서 베스트셀러에 의기양양 오르는 마당에 아직 공기접촉을 못한 납작한 나의 신2에게 미안할 따름이다.
일하는 동안 이런 마음조차 점점 애증으로 변할 지라도. 몇 번이라도 좋다, 이 끔찍한 생이여- 다시!
마음껏 탐서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지지 않는다고 해도. 몇 번이라도 좋다, 이 끔찍한 생이여- 다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