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사항

2008. 5. 14. 00:29
book judain

충분히 낚이기 좋은 키워드가 아닌가. 책과 유럽이라니.
책마을이라고 하면 영국 '헤이온와이'밖에 안 떠오르는데, 그런 책마을을 전략적으로 만들어가고 있는 곳이 유럽 곳곳에 널려있단다. 허걱. 헤이온와이는 유럽배낭여행에선 교통편 문제로 잘 찾아갈 엄두를 못 낸다... 마찬가지로 책마을들은 흔히 알려진 대도시 보다는 지방 중소도시나 농촌을 중심으로 사업화하고, 관광객을 유치하기도 하고. 농촌부흥정책의 하나?로 잘 일궈져 가고 있는 중이었다.

책날개에는 저자는 '적지 않은 책을 내놓았으면서도 아직까지 내용과 형식에서 '마음에 드는 내 책'을 보지 못해 아쉬워하다가 자연스레 책에 대한 남다른 애증을 갖게 되어 농촌과 독서 문화의 전 세계적인 위기에 공감하면서, 유럽의 책마을이라는 독특한 도농 문화의 대안적 변신에 주목하고 그곳들을 찾아다녔다.'고 밝히고 있다. 그럼 이번엔 마음에 드는 책을 냈다는 건가?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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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9
책을 싫어하는 사람은 드물다. 책을 읽을 마음과 경제적 여유가 없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특별히 병적인 이유가 아닌 한, 책을 혐오하거나 기피하는 사람은 희귀하다. 책에 대한 사랑은 내리사랑처럼 자연스럽고 일방적인 면까지 있다.
책은 우리 유년기의 기억을 가장 강렬한 냄새로 물들인다. 아마 엄마 젖냄새 다음으로 강렬하지 않을까. 본능을 자극하는 달콤하고 야만적인 젖냄새가 가장 깊은 자연의 냄새라고 한다면, 책은 가장 해묵은 문명의 냄새를 풍긴다. 엄마 품에서 떨어져, 아니면 엄마 품 안에서도, 처음 책장을 넘길 때 고약하게 우리의 콧구멍을 파고들던 그 종이와 잉크냄새......

머리말에서부터 책에 대해 '엄마 젖냄새 다음으로 강렬하다'고 말하는 저자가 좋았다. 그리고 계속해서 심상치않은 그의 표현력에 나는 꼴딱꼴딱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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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52
장터의 모퉁이를 차지한 자크 콜롱비니 부부는 아장시市에서 왔다. 새벽부터 한 시간 남짓 차를 몰아서 온 이들 노부부는 은퇴 후에 이 일을 시작했다가 완전히 빠져들었다. 자기 집 텃밭에 붙은 창고는 항상 책이 가득 넘치는 진짜 도서관이라며 놀러오라고 했다.
노부부는 70 줄에 접어들었지만 이 일을 아주 즐기고 있다. 1년 내내 그럭저럭 모아두었다가 이날 가지고 나와 파는데 벌이에 상관없이 새로운 책을 접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두 분은 연금생활자로서 특별한 어려움은 없지만, 이 일을 시작한 뒤로 오늘을 기다리면서 책을 모으다보니, 어디를 가나 많은 책이 눈에 띄고, 또 독서의 즐거움으로 화제도 풍부해졌으며, 여성 전기물을 탐독하면서 역사에 엄청난 관심을 갖게 되어 좋다고 했다. 하지만 영감님은 이런 할머니의 말을 가로채면서 내외의 거리는 책 때문에 더 멀어졌노라고 우스갯소리를 했다.


한적한 도농과 따뜻한 서가들, 그리고 노부부. 이런 풍경이 한 폭에 담길 수 있다는 것이 막연하기만 하다. 하지만 저자는 그 꿈같은 풍경을 두 발로 돌아다니면서 명성왕후의 일대기를 그린 프랑스 소설이라던지, 한국전쟁 전후의 사진집들이라던지 대륙을 돌고 돌며 그 가치를 더해가는 희귀본들과 관련 고서들(사실 유럽에서는 100년도 우습다)을 찾으며 기쁨을 느끼고 있었다. 유럽 한 가운데서 수많은 손을 거치고 살아남은 그 생존력 넘치는 역사적 산물과 작은 마을 한 귀퉁이에서 조우하는 순간을 떠올려보라!

그러면서도 '반면에'로 시작하는 우리나라의 책 문화를 반성하는 글귀들을 이어 토해낸다.

p.63
우리나라에서 책값은 얼마던가? 아니, 수박 한 통은 얼마더라? 등심 1인분은 얼마인가? 운동화 한 짝에도 7만-8만원은 된다. 아직도 끄떡없는 염천교에서 인두로 지지던 식의 중고 구두라도 몇만 원은 한다. 그렇다면 우리 현실에서 책은 헌 신발짝 값만도 못하다. 중고 서적은 대체로 무게로 저울에 달아 유통된다. 출판인이나 저자 편에서는 국민 수준이 낮다고 하고, 국민은 책이 제값을 못한다고 의심한다. 아무튼 도서의 하향 평준화는 분명하다. 수많은 시간과 지성을 쏟은 저자나 역자의 책이든, 시정잡배가 대필시켜 쓴 책이든 종이 값이나 쪽수로서 정가를 맞춘다. 지성과 정신노동의 가치를 이렇게 경시하고 저평가하는 사회에서 사상의 향기는커녕 타인의 생각을 거울로 삼아 자신을 도야하며, 바람직한 인내심 같은 것을 키울 여지란 기대하기 어렵다. 큰소리치는 사람이 이기는 법이니, 시적인 표현을 제외하면 아예 상스러운 고함조차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읽어야 하는 소리없는 대화로서 독서의 미덕을 누가 옹호할까?

p.91
도서 유통의 장려는 지속적인 지원 대상이라는 논리도 책마을 지원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는 반대 여론을 잠재운다. 기본적 문학 행위란 글쓰기가 아니라 '출판이며 인쇄하고 독자가 구매하는 행위'라는 주장도 뒷받침이 되었다. 적어도 프랑스에서의 최근 통계를 보면 어림잡아 500권의 원고 중 두어 권만이 소설로 출간된다. 이렇게 문학은 수많은 사산아를 쏟아낸다. 이런 끔찍한 문학적 연쇄 살인 사건은 발행인이 무시하거나 거절해서 사산아가 되고, 또 모든 원고를 출판해서 옥동자로 내놓을 수 없고 거절할 수 밖에 없는 한 불가피하다. 문학적으로 낙태하거나 유기되는 원고는 너무 많고, 문단에 선을 보이지 못한 채 10대 미혼모가 낳은 아이처럼 버려지는 '옥고玉稿'도 얼마나 될지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문학이 산업화하면 할수록 이런 비극은 더욱 늘어날 것이니 유기되는 작품을 위한 '원고 복지회' 같은 것이라도 만들어 다른 집이나 기관에서 살려내도록 입양이라도 보내는 편이 낫지 않을까?


'잘 팔리는 책과 출판 문화'에 대한 현실은 잠깐 키핑해둬. 일단 책을 덮고 나는 책이 좋은 사람들이 모여사는 마을에서 흰 모시를 입고 평상에 앉아 부채질을 느긋하게 해 가며, 펼쳐진 책을 향해 안경을 추스려올리는 노년을 상상해본다.

아, 헌책방에 가고 싶어졌다.
어디가 좋을까. 공씨책방? 신고서점도 한번 가보고 싶은데. 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