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사항

2015. 1. 7. 23:54
book judain

연남동 야매 교습소의 이름을 'workroom without sorrow'로 할까 한다고 박카피님이 말했다. 시집 <슬픔이 없는 십오 초>에서 따온 것이라고.

광화문 외근길에 그 시집을 샀다. 그리고 퇴근길 지하철에서 넘겨보는데, 시 '식후에 이별하다'에 후욱- 마음이 구멍이 나고 슬픔이 새기 시작했다.



식후에 이별하다

심보선


하나의 이야기를 마무리했으니
이제 이별이다 그대여
고요한 풍경이 싫어졌다
아무리 휘저어도 끝내 제자리로 돌아오는
이를테면 수저 자국이 서서히 사라지는 흰죽 같은 것
그런 것들은 도무지 재미가 없다

거리는 식당 메뉴가 펼쳐졌다 접히듯 간결하게 낮밤을 바꾼다
나는 저기 번져오는 어둠 속으로 사라질테니
그대는 남아 있는 환함 쪽으로 등 돌리고
열까지 세라
열까지 세고 뒤돌아보면
나를 집어 삼킨 어둠의 잇몸
그대 유순한 광대뼈에 물컹 만져지리라

착한 그대여
착한 그대여

내가 그대 심장을 정확히 겨누어 쏜 총알을
잘 익은 밥알로 잘도 받아먹는 그대여
선한 천성의 소리가 있다면
그것은 이를테면
내가 죽 한 그릇 뚝딱 비울 때까지 나를 바라보며
그대가 속으로 천천히 열까지 세는 소리
안 들려도 잘 들리는 소리
기어이 들리고야 마는 소리
단단한 이마를 뚫고 맘속의 독한 죽을 휘젓는 소리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먹다 만 흰죽이 밥이 되고 밥은 도로 쌀이 되어
하루하루가 풍년인데
일 년 내내 허기 가시지 않는
이상한 나라에 이상한 기근 같은 것이다
우리의 오랜 기담은 이제 여기서 끝이 난다

착한 그대여
착한 그대여

아직도 그쪽의 풍경은 환한가
열을 셀 때까지 기어이 환한가
천 만 억을 세어도 나의 폐허는 빛나지 않는데
그 질퍽한 어둠의 죽을 게워낼 줄 모르는데



그 때 그 마음이 저랬을까, 열까지 세는 나를 기다렸을까, 하며 시 한 편으로 혼자 날을 세워 나를 긁어내렸다. 그리고 패인 홈으로 오래 고여있던 슬픔을 흘려보냈다.



마음이 조금 보송보송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