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사항
좀머씨 이야기, 향수, 콘트라베이스, 비둘기... 쥐스킨트 작품은 이 네 권 밖에 읽어보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고등학교 때 좋아하는 작가를 물어보면 쥐스킨트!라고 대답했다. 이후에 향수가 영화화되고 쥐스킨트가 더 이상 나만의 숨겨둔 남자친구 같은 작가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 다음부터 나는 쥐스킨트를 멀리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미 그의 은밀한 삶과 세상에 대한 관찰력이 내 안에 스며들었다는 것을, 다시 비둘기를 읽으며 느꼈다. 새삼. 쥐스킨트가 좋다고 말하고 싶어졌다.
플랑슈 가에 있는 집 7층, 24호. 사랑의 감정을 느낄 만큼 마음에 꼭 맞는 이 공간에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삶을 살아가던 조나단이 어느 날 문 앞 복도에서 비둘기 한마리와 맞닥들며 우르르쾅쾅 흔들리는 일상을 경험하는 이야기다.
하필 갈매기의 꿈에 나오는 주인공 조나단 리빙스턴과 같은 이름의 조나단씨가 비둘기 때문에 기겁한다는 이 이야기의 설정은 쥐스킨트가 만들어놓은 겹겹의 의도에 감탄할 포인트 중 하나다.
어떻게 보면 그 눈 속에 교활한 머뭇거림이 숨어 있는 것 같기도 하였다. 또 어떻게 보면 그것은 무표정하거나 머뭇거리는 듯 보이지 않았고, 외부의 빛을 몽땅 빨아들이기만 할 뿐 자기 자신은 빛을 전혀 밖으로 내보내지 않는 카메라의 렌즈처럼 생명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어떤 광채나 희미한 빛 조차도 그 눈에는 나타나지 않았으며, 살아있는 흔적이라고는 도무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아무것도 보지 못할 눈이었다. 바로 그 눈이 조나단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p.17
의외로 많은 사람들은 비둘기에 기겁한다. 이탈리아 베네치아에 있는 산마르코 광장에서 '생애동안 볼 비둘기를 다 본' 사람들도 비둘기에 대한 내성을 갖진 못한다. 가만히 앉아있거나, 갑자기 푸드덕 날거나 하는 방식으로 누구의 일상을 뒤흔들 수 있는 힘을 비둘기는 가지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조나단의 행동은 비둘기 한마리에 호들갑이냐- 유난스럽다고 하기보다 "음, 그럴 수 있는 일이지" 하고 연민의 손을 흔들어주고 싶다. (이렇게 갑자기 맞닥들일 수 있는 주변의 것들을 특별하고 섬세하게 바라보는 방식의 이야기가 나는 너무 좋다.)
아주 개인적인 삶의 방식을 철저하게 고수하는 조나단. 읽는 내내 그에게 이유있는 일정함을 유지하면서 살아가는 삶에 대해 조목조목 설득 당했다. 그만큼 그가 비둘기 때문에 집을 나오고 앞으로의 삶을 걱정하는 표현들이 내 마음에 꼭 들었다. 그렇게 조금만 틀에 어긋나도 끝이 흐지부지 되어버리는 최악을 상상하게 만들더니, 마지막에는 비둘기가 날아가고 흔적조차 없는 익숙한 집 앞으로 다시 돌아온다. 무.슨.일.있.었.냐.는.듯.이!!! (와오와오왕~)
조나단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테고, 늘 살아가던대로 일을 하고, 또 일요일을 즐길 것이다. 인생의 틀을 벗어나는 두려움과 그것이 별것 아님을 알게끔 도와주었지만, 변화는 없을 것이다. 단순하고 일정하게 살아가는 데에 그토록 복잡한 내면의 이유가 있는 것을 알았으니, 그 삶의 방식을 존중해 주어야지 별 수가 있나.
책날개에는 '사람 만나기를 싫어해 상 받는 것도 마다하고, 인터뷰도 거절해 버리는 기이한 은둔자.'라고 쥐스킨트를 소개하고 있다. 밖으로 드러나기 보다 안으로 숨어들어 내면을 고찰하고, 행동의 이유를 디테일하게 묘사하는 연습을 하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어떤 것은 정말 두루뭉수리하게 피어있는 내 마음을 이렇다 할 단어들로 풀어놓은 것 같아 어찌나 섬뜩한지! 이렇게 꼴깍꼴깍 침을 삼키며 책장을 한장 한장 넘기게 만드는 쥐스킨트의 단편에 나는 목이 마르다. 신작 소식이 언제쯤 들려오려나.
사진] 베네치아, 산마르코 광장. 2007. lomo lc-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