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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사항
현대소설의 본질
어떤 사람을 둘러싼 세계에서 원인과 결과의 연결고리를 제거하면 그는 무기력해진다. 그렇다면 이건 우리 인생에 대한 은유가 아닐까. 사춘기가 지나면서 우리 인생도 조금씩 인과의 사슬에서 벗어나니까. 공부를 열심히 한다고 해서 원하는 대학에 갈 수 있은 건 아니라거나 착하다는 이유만으로 잘 살지는 못한다는 걸 우리는 깨달아간다. 해서 무기력은 현대인의 기본적 소양이다. 그런 무기력의 양대 산맥이 바로 현대 연애와 암 선고다. 내 뜻과 무관하게 느닷없이 찾아오는 질병과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없는 연인을 견디는 일이 현대소설의 본질이 되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결국 현대소설의 윤리는 불안을 이겨내고 타자와 공존하는 그 용기에 있는 셈이다. 이 용기는 그러니까 모두들 안 된다고 말하고, 또 자신부터가 여러 번 실..
식후에 이별하다
연남동 야매 교습소의 이름을 'workroom without sorrow'로 할까 한다고 박카피님이 말했다. 시집 에서 따온 것이라고. 광화문 외근길에 그 시집을 샀다. 그리고 퇴근길 지하철에서 넘겨보는데, 시 '식후에 이별하다'에 후욱- 마음이 구멍이 나고 슬픔이 새기 시작했다. 식후에 이별하다 심보선 하나의 이야기를 마무리했으니 이제 이별이다 그대여 고요한 풍경이 싫어졌다 아무리 휘저어도 끝내 제자리로 돌아오는 이를테면 수저 자국이 서서히 사라지는 흰죽 같은 것 그런 것들은 도무지 재미가 없다 거리는 식당 메뉴가 펼쳐졌다 접히듯 간결하게 낮밤을 바꾼다 나는 저기 번져오는 어둠 속으로 사라질테니 그대는 남아 있는 환함 쪽으로 등 돌리고 열까지 세라 열까지 세고 뒤돌아보면 나를 집어 삼킨 어둠의 잇몸 그..
읽었으나 읽지 않았다
책 속 마지막 단편 '...그리고 하나의 고찰'은 과거에 내가 '그 책'을 읽었으나 기억나지 않는 문제에 대해 말한다. 읽는 동안에 분명 "뒤죽박죽으로 엉켜 있는 내 의식에 길을 내고 유례없이 새로운 시야를 열어 주고 새로운 인식과 연상들을 샘솟게" 하는 경험을 하였으나, 시간이 흐른 뒤 그 책이 무슨 내용이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 문제. 여기서 작가는 읽었으나 안 읽은 것이 되어버리는 이 현상을 두고 '책의 내용은 뇌리를 스쳐지나가도 그 경험은 서서히 무의식에 스며들어 삶을 변화시켰을 것'이라고 기대한다. 책을 덮고 멍하게 눈 앞의 책장을 바라보다가, 그 '문제의 책'들이 수두룩한 걸 발견했다. 주인공의 이름이나 줄거리 같은 내용은 커녕 어떤 의미로 남았고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 조차 남아있지 않은 책..
아빠라는 남자, 마스다 미리
마스다 미리의 엄마아빠 시리즈 중"아빠라는 남자"를 빌려 읽었다. 이 책의 매력은 아빠라는 남자에 대해 나열한목차를 훑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툭하면 남의 구두를 신고 들어오는 남자 탁자 위의 음식은 일단 먹고 보는 남자 웬만해선 손을 안 씻는 남자 한시도 가만있지 못하는 남자 성격은 급한데 낚시를 좋아하는 남자 짐을 안 만드는 남자 좋고 싫음이 분명한 남자 글씨와 성격이 정반대인 남자 싫은 건 무조건 티 내는 남자 애정 표현이 서투른 남자 집 안에서나 밖에서나 변함이 없는 남자 푼돈에 인색하지 않은 남자 ... 아빠에 대한 애정 넘치는 시선,하지만 딸은 말한다. "내 애인이 아빠같이 군다면정말 못참을 거예요"(싱긋